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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고 슈페를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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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고 슈페를레는 독일의 군인으로,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항공 관측병으로 복무했으며, 이후 공군 지휘관으로 경력을 쌓았다. 스페인 내전 당시 콘도르 군단의 초대 사령관을 맡아 게르니카 폭격을 지휘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제3 항공 함대를 지휘하며 서부 전선과 영국 본토 항공전에 참여했으며, 1940년 원수로 진급했다. 전쟁 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으며, 1953년 뮌헨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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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고 슈페를레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슈페를레 (1940년)
출생일1885년 2월 7일
출생지루트비히스부르크, 뷔르템베르크 왕국, 독일 제국
사망일1953년 4월 2일
사망지뮌헨, 바이에른, 서독
군사 복무
소속(1903–18)
(1918–33)
(1933–44)
복무 기간1903–1944년
계급원수
병과독일 제국 육군 (1903–14)
독일 제국 항공대 (1914–18)
국방군 (1918–35)
루프트바페 (1935–44)
지휘제1 비행 사단
제3 항공 함대
부대콘도르 군단
참전제1차 세계 대전
스페인 내전
제2차 세계 대전
프랑스 전투
영국 본토 항공전
블리츠
체르베루스 작전
베데커 공습
슈타인보크 작전
오버로드 작전
수상기사 철십자 훈장
스페인 십자장
기타

2. 초기 생애 및 제1차 세계 대전

후고 슈페를레는 1885년 2월 7일 독일 제국 뷔르템베르크 왕국 루트비히스부르크에서 양조장 주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3년 독일 제국 육군에 사관후보생으로 입대하여 제8 뷔르템베르크 보병 연대에 배속되었고, 1904년 소위로 임관하였다. 1913년에는 중위로 진급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슈페를레는 독일 육군 항공대(루프트슈트라이트크래프테)에서 포병 관측병 훈련을 받고 있었다. 1914년 11월 대위로 진급한 그는 전쟁 중 관측병으로 복무하다 크리그스아카데미에서 조종사 훈련을 받았다. 이후 제42 및 제60 야전 비행대를 지휘하고 제13 야전 비행단을 이끌었다. 쾰른의 항공 관측 학교로 전근을 갔으며, 전쟁이 끝났을 때는 제7군에 배속된 비행 부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그는 호엔촐레른 왕가 훈장 검 기사 훈장을 수훈했다.

3. 전간기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슈페를레는 자유군단에 입대하여 항공 부대를 지휘했으며, 이후 국방군에 합류했다. 실레지아에서 자유 의용 비행 부대 412를 포함한 부대를 지휘했고, 폴란드와의 분쟁 당시 동프로이센 국경에서 싸웠다. 1919년부터 1923년까지 슈투트가르트의 제5 군관구(방위군구 5) 항공 참모로 근무했고, 1924년까지 국방부에서 근무했다. 이후 제4보병사단 참모로 드레스덴 근처에서 복무했다.

이 무렵 슈페를레는 소련리페츠크를 방문하여 독일군의 비밀 공군 기지 및 리페츠크 전투기 조종사 학교 설립에 관여했다. 리페츠크에서 쿠르트 슈투덴트와 함께 1924년부터 1932년까지 약 240명의 독일 조종사를 훈련시키는 선임 감독관 역할을 했다.

1927년 소령으로 무장부의 항공 참모장이 되었으며, 1929년 헬무트 펠미로 교체되었다. 슈페를레의 퇴임은 그가 자율적인 항공 당국을 추진하고 있을 때 이루어졌다. 1931년 제14보병 연대 제3대대를 지휘하면서 중령으로 진급했고, 1933년 10월부터 1934년 4월까지 제8보병 연대 지휘관을 역임했다.

1934년 대령으로 제1항공사단(Fliegerdivision 1) 본부 지휘권을 인수받아 육군 지원 항공 조정을 담당했다. 공식 직함은 "Heeresflieger 사령관"(Kommandeur der Heeresflieger)이었다.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 집권 후, 헤르만 괴링은 국가 항공부를 창설했고, 슈페를레에게 기존 대부분의 비행대대를 넘겨주었다.

1935년 3월 1일, 헤르만 괴링은 루프트바페의 존재를 발표했고, 슈페를레는 국가 항공부로 전출되었다. 처음에는 ''Luftkreis'' II (제2 항공 지구) 지휘권을 받았고, 1935년 10월 1일 준장으로 진급한 후에는 뮌헨의 ''Luftkreis'' V를 지휘했다.

4. 스페인 내전

스페인 내전 발발 후, 슈페를레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 이끄는 국민파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독일 공군 부대인 콘도르 군단의 초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슈페를레는 임명과 동시에 스페인 작전에 투입될 모든 독일군 부대의 지휘를 맡았다. 1936년 11월 1일, 콘도르 군단은 총 4,500명이었으며, 1937년 1월까지 6,000명으로 증가했다. 이들은 분쟁 기간 동안 교대되어 최대 인원이 전투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이 알렉산더 홀레를 대신하여 슈페를레의 참모장으로 배정되었다. 슈페를레는 참모 경험이 있는 유능한 인물을 필요로 했다. 그는 1920년대부터 리히트호펜을 알고 있었고 그의 참모장을 높이 평가했다. 슈페를레는 사적으로 리히트호펜을 냉혹한 속물로 여겼고, 리히트호펜은 상관의 거친 재치와 식사 매너를 싫어했다. 그러나 그들은 전문적으로 의견 충돌이 거의 없었고, 리히트호펜이 프랑코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슈페를레는 일상적인 업무를 그의 손에 맡겼다.

슈페를레와 리히트호펜은 스페인에서 효과적인 팀을 이루었다. 슈페를레는 경험이 풍부하고 지적이며 평판이 좋았고, 리히트호펜은 훌륭한 전투 지휘관으로 여겨졌다. 그들은 프랑코에게 조언하고 반대하여 공군력의 오용을 막았다. 두 사람 모두 스페인 지도자에게 직설적이었고, 독일인과 스페인인은 서로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효과적인 협력 관계로 이어지는 건강한 존경심을 발전시켰다.

스페인, 1936년의 슈페를레와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슈페를레는 ''공군 최고 사령부(Oberkommando der Luftwaffe, OKL)''의 지원을 받았다. 참모 장교들은 작전 수준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훈련받았고, OKL은 세부적인 사항을 관리하는 것을 꺼렸기 때문에 슈페를레와 리히트호펜은 전술적, 작전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자유롭게 고안할 수 있었다. 중요한 단계는 전선 신호 기지, 육군 및 공군 기지와 동시에 연락을 취하는 기지를 사용하여 지상-공중 통신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공군 기지로 전화된 정보는 무선으로 비행 중인 항공기에 신속하게 중계되었다. 이 혁신은 분쟁 기간 동안 실행에 옮겨졌다.

슈페를레는 1936년 10월 31일 비행기로 독일을 출발하여 11월 5일 로마를 거쳐 세비야에 도착했다. 그는 ''Kampfgruppe'' (폭격기 부대—K/88), ''Jagdgruppe'' 88 (제88 전투기 부대—J/88) 및 ''Aufklärungsstaffel'' (정찰 비행대—AS/88)을 받았다. 이들은 통신, 수송 및 정비 부대가 있는 3개의 중포대와 2개의 경포대를 갖춘 ''Flak Abteilung'' (F/88)의 지원을 받았다. 독일은 군단을 완전히 갖출 여유가 없었으므로, 공군 부대는 스페인 장비를 사용했다. 사용된 1,500대의 차량 중 100가지 유형이 있어 정비에 어려움을 겪었다. 군단의 첫 번째 임무는 공수 수송으로 아프리카 육군의 20,000명의 병력을 수송하는 것이었다. 이 베테랑들은 일단 상륙하면 전투에서 단련된 핵심 병력을 제공했다.

5. 제2차 세계 대전

1939년 9월 1일, 독일 국방군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슈페를레의 제3항공함대는 서부 독일의 영공 방어를 맡았으며, 이는 소련과의 불가침 조약 덕분에 가능했다. 제3항공함대는 1939년 3월에 보유했던 거의 모든 전투 부대가 제거된 상태였다. 슈페를레는 막시밀리안 리터 폰 폴 소장을 참모장으로 맞이했다. 두 사람은 "좋은 파트너십"을 이루었다.

가짜 전쟁 동안, 슈페를레의 소규모 항공 함대(306대, 구식 Arado Ar 68 33대 포함)는 프랑스와 영국의 정찰 공격을 격퇴했다. 슈페를레는 1939년 9월 13일, 극도로 높은 고도에서 장거리 고고도 정찰 임무를 수행하도록 승인받았다. 1939년 11월 21일~24일 사이에는 8대의 항공기를 잃었지만, 좋은 정찰 결과를 얻는 데 성공했다.

제3 항공함대(Luftflotte 3)는 1940년 봄에 대대적으로 증강되었다. 슈페를레의 사령부는 바트오르프에 있었다. 제3 항공함대는 후베르트 바이스 상급대장의 제1 방공군단(I. ''Flakkorps''), 울리히 그라우어트 대장의 제1 항공군단(I. ''Fliegerkorps''), 브루노 로어처 대장의 제2 항공군단(II. ''Fliegerkorps''), 로베르트 리터 폰 그라임 소장의 제5 항공군단(V. ''Fliegerkorps'')에 배속되었다. 다가오는 전투를 위해 슈페를레는 1,788대의 항공기(가동 가능 1,272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슈페를레(오른쪽), 프랑스 참모 장교와 함께


황색 작전(Fall Gelb)은 1940년 5월 10일에 시작되었다. 슈페를레의 항공함대는 벨기에 전투와 프랑스 전투에서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와 A 집단군을 지원하는 작전에 참여했으며, C 집단군도 지원했다. 슈페를레의 대공 작전은 표적에 대한 부정확한 사진 판독으로 인해 시작이 좋지 않았지만, 그는 나중에 제3 항공함대의 작전이 제공권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이었다고 주장했다. 1940년 5월 10일부터 13일까지 슈페를레의 항공함대는 공중전에서 89대의 항공기를 격추했고, 대공포에 의해 22대, 지상에서 233~248대를 격추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주목할 만한 사건으로, 제3 항공함대 소속 부대 중 하나인 KG 51의 8./부대가 실수로 프라이부르크를 폭격하여 민간인 158명이 사망하고 22명의 어린이가 사망했다. 실수를 은폐하기 위해 나치 선전부 장관 요제프 괴벨스는 영국과 프랑스를 "프라이부르크 학살"의 배후로 비난했다.

슈페를레의 폭격기는 돌파구를 마련했다. 로어처와 그라우어트의 항공군단은 정찰기에 프랑스 영토 내 약 400킬로미터까지 진입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들은 세당 지역을 피하여 독일군의 진격에 프랑스의 주의를 끌지 않도록 했으며, 연합군의 반응을 면밀히 감시했다. 슈페를레의 항공군단 지휘관들은 항공 차단 작전을 목표로 삼고, 프랑스군의 마지노 선에서 서쪽으로의 배치를 막고 뫼즈 강을 가로지르는 통신을 방해하여 연합군 예비군을 묶어두기 위해 철도 통신 공격을 명령했다.

1940년 5월 13일, 파울 루트비히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의 제1 기갑군은 몽테르메에서 뫼즈 강을 건널 준비가 되어 있었고, 하인츠 구데리안의 제19 군단은 세당에 있었다. 돌파를 지원하기 위해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소장의 제8 항공군단(VIII. ''Fliegerkorps'')이 제3 항공함대로 이관되었다. 로어처는 리히트호펜의 병력 일부를 지원받아 세당에서 구데리안의 돌파를 지원했다. 슈페를레는 방어선에 대한 단일 대규모 폭격을 준비했다. 로어처는 이 계획을 수행하지 않고, 뫼즈 전선에서 일련의 폭격 작전을 수행했다. 제2 항공군단은 1,770회 출격했고, 리히트호펜의 부대는 360회 출격했다. 폭격은 세당에서의 돌파를 가능하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슈페를레의 전투기는 연합군이 5월 14일 교량 점령 후 교량을 폭격하려는 시도를 격퇴했다.

슈페를레와 케셀링은 덩케르크 전투 중 정지 명령에 반대했다. 두 사람 모두 공군력만으로는 포위를 줄일 수 없다고 믿었다. 5월 26일, 제1, 제2, 제5, 제8 항공군단의 참모장은 오샹 근처의 루몽 성에서 슈페를레와 함께 작전 조정 문제를 논의하는 회의를 열었다. 블레츨리 파크의 울트라는 리히트호펜의 신호를 가로챘고 10대의 항공기가 건물을 폭격하기 위해 파견되었는데, 건물을 명중시켰지만 피해는 거의 없었다.

''적색 작전''(Fall Rot)—슈페를레는 서부 독일에서 대서양 해안까지 항공함대를 지휘했다.


케셀링의 항공함대가 덩케르크 상공의 작전을 수행하는 데 주력했지만, 슈페를레의 부대도 해상 차단 작전을 수행했다. 5월 27일부터 슈페를레의 제1 및 제2 항공군단은 칼레-덩케르크 지역의 제공권을 확보하려 시도했다. 칼레는 이전 날 함락되었다. 항구 상공에서 독일 공군은 89척의 선박(126,518 grt)과 8척의 구축함을 격침시키거나 손상시켰으며, 21척이 더 손상되었다. 슈페를레와 케셀링은 1,997회 전투기 작전, 1,056회 폭격기 작전, 826회 타격 작전을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덩케르크 철수를 막지 못했다.

적색 작전을 위해 항공함대는 재편성되었다. 슈페를레는 제2 및 제5 항공군단과 제1 방공군단을 유지했다. 슈페를레는 프랑스 깊숙이 공격해야 했으며, 메서슈미트 Bf 110을 갖춘 구축기 항공기의 대다수를 받았다. 이 중 절반은 그라임과 로어처에게 주어졌다. 슈페를레는 1,000대의 항공기를 동원할 수 있었다. 6월 5일, 슈페를레의 작전 명령에는 리히트호펜의 제8 군단과 마소프의 Jafü 3이 포함되었다.

공세의 서곡으로 슈페를레는 파리에 대한 전략 폭격 작전을 수행할 계획이었다. 슈페를레는 5월에 제2, 제5, 제8 항공군단을 사용하여 파리에 대한 공습을 오랫동안 계획해왔다. 그는 5월 22일 기상 악화로 인해 계획을 포기해야 했지만, 다음날 OKL은 파울라 작전 계획을 준비했다. 이 작전은 파리 비행장에서 발견된 약 1,000대의 프랑스 항공기를 공격하는 것뿐만 아니라 공장도 공격하고 프랑스 국민의 사기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이 작전은 열악한 참모진의 업무 처리와 에니그마 기계에 대한 과도한 자신감으로 인해 실패했다.

6월 5일 슈페를레의 부대는 철도 및 지역에 대해 8번의 폭격 작전을 수행했으며, 도로 표적에 대해 21~31번, 병력 열에 대해 12번, 프랑스 육군 방어선 또는 거점에 대해 34~42번의 폭격을 수행했다. 제2 항공군단만 276회 폭격 임무를 수행했다. 6월 12일 프랑스 전선이 붕괴되자 슈페를레는 파리에 대한 새로운 공격을 계획했지만, 공격이 수행되기 전에 개방 도시로 선언되었다. 슈페를레는 서쪽에서 마지노 선을 포위하라는 명령과 함께 남쪽으로 진격하는 룬트슈테트를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3 항공함대는 루아르에서 교량 차단 작전을 수행했고, 6월 17일 구데리안은 스위스 국경에 도달하여 포위를 완료했다. 슈페를레는 두 번째 철수인 에어리얼 작전을 막으려 했지만, ''란카스트리아''를 격침시켜 5,8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뿐이었다.

6월 20일 1940년 6월 22일 휴전을 위한 조치가 취해졌다. 슈페를레는 이를 알게 되자 보르도에 대한 폭격 작전 계획을 포기하라고 명령했다. 6월 24일 21:00에 슈페를레는 제3 항공함대에 다음날 아침 00:35까지 작전을 중단하라고 명령했다. 1940년 야전원수 수여식에서 슈페를레는 그 계급으로 승진했다.

1940년 7월 윈스턴 처칠 정부는 히틀러의 평화 제안을 거부했다. 히틀러는 영국을 전쟁에서 몰아내기로 결심했다. OKL은 독수리 작전(Operation Eagle Attack)을 위한 잠정적인 계획을 시작하여 영국 공군 전투 사령부(RAF Fighter Command)를 파괴하고 제공권을 확보한 다음, 바다 사자 작전(Operation Sea Lion)이라는 암호명으로 영국에 대한 상륙 작전을 지원하려 했다.

슈페를레는 영국 공군이 '통과하는 길'로 격파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항구와 상선을 공격하려는 그의 개인적인 전략은 괴링에 의해 거부되었는데, 표면적으로는 항구가 침공에 필요했기 때문이다. 슈페를레와 케셀링은 영국 전투 사령부가 보유한 전투기의 수를 과소평가하여 잘못 계산하거나 정보에 의해 오도되었다. 그들은 영국 공군의 총 항공기 수를 450대로 추산했지만 실제 수치는 750대였다.

프랑스 공방전 이후, 루프트바페는 세 개의 ''루프트플로텐''(항공 함대)으로 재편되었다. 알베르트 케셀링 원수가 지휘하는 ''루프트플로테'' 2, 한스-위르겐 슈툼프 ''루프트플로테'' 5는 노르웨이에 주둔하고, ''게르트마르샬'' 슈페를레가 지휘하는 ''루프트플로테'' 3이 있었다. 각 ''루프트플로테''는 자체 해안 지역에서 선박을 공격하기로 되어 있었다.

케셀링은 북부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및 북동 프랑스에 주둔한 모든 공군 부대를 담당했고, 슈페를레는 북부 및 서부 프랑스에 주둔한 병력을 통제했다. ''루프트플로테'' 3은 브리타니에 주둔하는 알프레트 켈러의 ''플리거코르'' IV],

6. 전후

슈페를레는 연합군에 체포되어 뉘른베르크 후속 재판의 고위 지휘부 재판에서 전쟁 범죄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무죄 사면되었다. 1949년 6월 뮌헨 법원에서 열린 두 번째 공판 후 다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슈페를레가 나치당이나 그 계열 조직의 일원이 아니었다고 결론지었다. 전쟁 후 그는 조용히 살다가 1953년 4월 2일 뮌헨에서 사망했다. 그는 바이에른주 타이닝 마을 묘지에 묻혔다.

뉘른베르크 재판의 피고석에 앉아있는 슈페를레.

7. 훈장


  • 철십자 훈장 1급 및 2급
  • 뷔르템베르크 군 공로 훈장
  • 바이에른 군 공로 훈장 4급 (검 포함)
  • 체링거 사자 훈장 기사 십자 2급 (검 및 참나무 잎 포함)
  • 호엔촐레른 왕가 훈장 (검 포함)
  • 명예 십자장 (제1차 세계 대전)
  • 국방군 근속 훈장 1급~4급
  • 조종사/관측사 휘장 (금색, 다이아몬드 포함)
  • 철십자 훈장 기사십자장 (1940년 5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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